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른트 슈나이더 (문단 편집)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커리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ernd schneider germany.jpg|width=100%]]}}} ||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슈나이더는 당시 '악동' 이라 불린 [[마리오 바슬러]]를 대신해 1999년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뉴질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뉴질랜드]] 전을 통해 국가대표에 데뷔했지만, 이 시기부터 독일 축구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본인도 별다른 활약을 못보여주었다. 결국 [[UEFA 유로 2000|유로 2000]]에서 당시 독일 축구의 희망이라 불린 [[세바스티안 다이슬러]]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엔트리에 제외되었으나, 다이슬러가 부상으로 한일 월드컵 직전 엔트리에서 탈락하면서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국대에 승선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보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었는데, 킥 능력과 드리블 능력 모두 엄청난 모습을 보이면서, 다이슬러의 공백을 지워버릴 정도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당시 난세의 영웅인 [[미하엘 발락]]과, 당시 초신성인 [[미로슬라프 클로제]], 그리고 [[올리버 칸]]이라는 괴물 [[골키퍼]]의 포스에 밀려서 그렇지 슈나이더가 보여준 팀의 공헌도는 앞의 삼인방 못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독일 대표팀 역시 당시 축구 트랜드를 따라기기 위해, 4-2-3-1과 4-4-2 포지션을 정착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슈나이더 역시 이러한 암흑기의 독일 축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분데스리가에서는 [[미하엘 발락]], 주앙 미쿠와 함께 끝판왕 미드필더로 포스를 보인 것과 다르게 국대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질 못했다. 당시, 슈나이더의 포지션은 오른쪽 윙어였는데, 이 때 플레이메이커를 기대했던 [[메멧 숄]]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는 인저리 프론으로 전력에 도움이 거의 되지도 않았고, 브레멘의 중흥기를 이끈 파비안 에른스트를 기용했으나 루마니아전에서 1-5 대패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슈나이더 역시 플레이메이커 자리에 기용된 적이 있으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때의 모습만큼 보여주질 못하면서 결국 모든 팀의 코어를 [[미하엘 발락]]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한다. 비록 발락에 비해 중원 조율 능력이 떨어져도 기술 면에서 뛰어났던 슈나이더는 대표팀에선 전혀 빛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당시 독일 대표팀은 발락 중심의 팀으로 실제 발락 없이 경기를 치룬 루마니아전과 헝가리전을 시원하게 말아먹으면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와는 반대로 레버쿠젠에서의 슈나이더는 그야말로 엄청난 포스를 보였는데, 사실 이 시기 분데스리가는 지금의 [[세리에 A]]보다도 평가가 훨씬 낮은 암흑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2003-04 시즌 클럽 커리어 하이를 찍었음에도 국대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질 못했으며, 훗 날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영건들이 성장하기 전까진 오직 발락의 원맨팀이였다. 그래도, 클럽에서의 꾸준함으로 슈나이더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당당히 엔트리에 들면서 아르네 프리드리히와 함께 독일의 오른쪽을 지탱한다. 그리고 개막전, 부상으로 결장한 발락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는데 기본적인 클래스는 여전했으나 전에 비해 서른줄이 넘긴 나이 때문인지, 체력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래도 [[미하엘 발락]] - [[토르스텐 프링스]]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함께, 독일의 중원을 든든히 지키며 조별 리그를 3전 전승으로 돌파하고 당시 준수한 전력을 보유한 스웨덴과, 극강의 경기력을 보여준 강력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준결승 #s-3|4강]]에서 결국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에 연장 접전 끝에 패하면서, 자국에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실패했다. 특히 클럽에서 플레이메이커로써의 완벽한 모습과는 달리 국가대표에서는 클럽에서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쉽다. 헌데, 일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키맨을 슈나이더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하이라이트만 보고 대충 눈요기로 판단하는 눈팅에 불과하다. 당시 클린스만이 대표팀 감독이였지만 전술적 부분은 여전히 뢰브가 담당했는데, 플랜 A로는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과 플랜 B로는 [[토르스텐 프링스]]의 원 볼란치에 좌우에 베른트 슈나이더 그리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나 혹은 [[팀 보로프스키]]를 배치, 그리고 [[미하엘 발락]]을 플레이메이커로 두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포지션을 취했다. 그런데 4강전 이탈리아전에서 프링스가 징계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자, 뢰브는 '''[[팀 보로프스키]] - [[미하엘 발락]] - [[제바스티안 켈]] - 베른트 슈나이더의 일자형태의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으로 이탈리아전에 임했다. 만약에 슈나이더가 키맨이라면 다이아몬드 형태에 슈나이더를 플레이메이커로 두고, 좌우로 [[팀 보로프스키]]와 [[미하엘 발락]]을 배치한 다음, 원 볼란치로 [[제바스티안 켈]]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2006 FIFA 월드컵 독일/준결승#s-3|전]]에서 슈나이더는 경기 전체를 조율한 것이 아니라 순간 침투로 이탈리아의 후방을 깨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4-4-2의 사이드 미드필더들도 키맨으로 활약할 수 있지만, 슈나이더와 맞붙는 위치인 시모네 페로타는 이경기에서 평점 8점을 [[파비오 그로소]]는 평점을 9점이다.[* 페로타와 그로소 이외의 키모라네시와, [[잔루카 잠브로타]]의 평점도 매우 높다. 이는 즉 이탈리아의 측면이 독일 측면을 완전 썰어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그로소는 결승골 뿐만 아니라, 공수 전체에서 페로타와 함께 수비에서의 단단한 모습과 공격에서의 위협적인 모습을 둘 다 보여주었다. 단순 골을 넣었다고 평점 9점을 받은게 절대 아니다. 물론 슈나이더가 전반 막판, 좋은 찬스를 보여주었지만 그게 다였다. 게다가 그 찬스는 [[미하엘 발락]]이 [[안드레아 피를로]]의 볼을 가로챈 뒤 바로 [[미로슬라프 클로제]]에게 연결시켜서, 클로제의 패스타이밍에 슈나이더가 침투하면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이라이트만 봤기 때문에 슈나이더의 활약이 대단한 건줄 알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후 슈나이더는 [[파비오 그로소]]에게 철저히 봉쇄당하면서 [[다비드 오동코어]]와 교체된다. 여튼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슈나이더도 30대 중반이 되기도 했고 [[요아힘 뢰프]] 감독 체제 하에 자신의 자리에 [[클레멘스 프리츠]]와 [[다비드 오동코어]]가 중용되기 시작했고, 2008년 허리 부상으로 [[UEFA 유로 2008|유로 2008]]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